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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칼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작성자

운영자

등록일

2010-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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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목사.jpg

조회수

17586

 
 
글 :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장).

이 글은 김명혁 목사님이 7월 25일 강원도 정선 유천교회에서 전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절)라는 제목의 설교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아름다운 산들로 둘러싸여있는 강원도 정선에 다시 와서 너무 좋습니다. 제가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 다음 주일인 2008년 1월 20일 주일 여기 정선 유천교회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했는데 2년 6개월이 지난 오늘 여기 다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너무너무 좋습니다. 저는 지난 2년 6개월 동안 주일과 주중에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며 설교를 했는데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가 있었고 주님의 마음과 사도 바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교회들에서 주님과 이웃을 정성껏 섬기고 있는 귀한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 아침 정선 유천교회에 와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요3:16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요3:16은 성경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너무나 귀중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세계에 어디를 가시든지 요3:16을 읽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만 백인들만 한국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바라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면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중심에는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은 사람들에게나타나지 않았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시편 136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라고 말씀했고 “들의 백합화와 들풀을 하나님이 입히신다”고 말씀했습니다(마6:26-30). 그러면 세상과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첫째로 다윗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죄를 범한 죄인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죄를 범했고 우리아에게도 죄를 범한 죄인이었습니다.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물론 다윗이 나중에 울면서 자기의 죄를 회개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너무나 많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너무나 크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푸신 것을 보고 울고 또 울고 울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사랑을 평생토록 찬양하고 또 찬양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1-5).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8,13,14). 사실 저는 이 시편을 매일 읽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는데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면 다윗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조상으로 만드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마1:1을 읽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 마9:27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쌔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얼마나 놀랍고 황송하고 크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며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139:17-18). 다윗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너무나 놀랍고 너무나 황송하고 너무나 컸습니다. 다윗은 지금도 그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둘째로 니느웨 성 사람들과 동물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은 구약 시대에 살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악독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는데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요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온갖 학대를 자행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들을 잡아서 죽여서 가죽을 벗겨서 성벽에 걸어놓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우리 민족에게 온갖 학대를 자행한 일본에 비길 수도 있고 북한에 비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앗수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온갖 테러와 학대를 자행한 이스라엘의 적국이요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말을 빌리면 ‘악의 축’이었습니다. 공격의 대상이었습니다.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나라와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 사람들과 동물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심판과 저주에서 구원하실 생각을 하셨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옛날 아브라함과 이사야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아브라함에게 이런 약속을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그런데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니느웨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옛날 이사야에게는 이런 약속을 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그 날에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라.”(사19:23,24).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앗수르 나라와 니느웨 성 사람들과 동물들을 가리키면서 “내가 [이들을] 아끼는 것이 (즉 불쌍히 여기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라고 애타는 사랑의 심정을 토로하시면서 저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니느웨를 아끼는 것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1) 라는 말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국가정책에 위배되는 말이었고 보안법에 걸리는 말이었습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해석하면 "내가 북한의 김정일과 그의 군인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와 비슷한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달할 전도자를 보내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나를 전도자로 택하셨습니다. 요나에게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욘1:2). 그러나 요나는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쳤습니다(욘1:3).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를 고기 배 속에 잡아 넣으시면서 억지로 니느웨까지 가게 만들었습니다. 요나를 고기 배 속에서 건지내신 다음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욘3:2).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끈질기고 강했습니다. 결국 요나의 전도의 말을 들은 니느웨 성의 사람들과 짐승들이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하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욘3:5).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3:7,8).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3:10). 니느웨 사람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했고 세계 중에 복이 되었습니다. 악독한 한 나라를 변화시킨 것은 강력한 군사적 대응이 아니었습니다. 유엔의 결의안도 아니었습니다. 앗수르와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끈질긴 긍휼과 사랑이 악독한 나라를 굴복시켰습니다. 변화시켰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끈질기고 강한 그리고 모순되고 역설적인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때문에, 함의 자손이라고도 말하는 아프리카 사람들도 구원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인 조선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도 구원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뿐 아니라 동물들과 식물들에게까지 긍휼과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1).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악독이 가득한 원수의 도성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셋째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을 사랑하시고 니느웨를 사랑하시고 기생 라합을 사랑하시고 문둥병자 나아만을 사랑하시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설명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이 최고로 나타난 사건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이 받을 천벌을 대신 받게 하시며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죄인들 대신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십자가의 사건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었고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역설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 대신 죽는다는 말입니까? 심청이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대신 죽은 일도 대단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대신 죽는다는 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모순되는 일이었고 도저히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이야말로 성자 예수님의 사랑이 최고로 나타난 사건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십자가 사건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긍휼의 사랑이 최고로 나타난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평생 사랑을 예찬하며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8,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하나님도 사랑이시고 예수님도 사랑이십니다.

넷째로 배신자 베드로와 핍박자 사울에게 나타내 보이신 예수님의 긍휼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십자가 사건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 이후에도 이어졌고 승천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사건이전에도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배신했고 부활사건 이후에도 예수님을 배신하며 디베랴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세 번씩이나 만난 후에도 부활의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너무나 괘씸한 배신의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은 배신자 베드로는 괘씸하게 보시며 심판의 채찍을 드시는 대신 배신자 베드로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디베랴 바다로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대신 긍휼과 동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베드로와 나머지 여섯 제자들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21:5). 계속해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한 마디 한 마디 하시면서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의 깨어진 믿음과 사랑을 회복시켜주셨고 잃어버렸던 소명을 되 찾게 하셨고 목양의 길로 순교의 길로 달려가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신자 베드로를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신 긍휼과 사랑의 주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은 승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였던 사울을 보시고 즉시 심판의 채찍을 드시는 대신 긍휼과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사울을 부르시며 타이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사울을 당장 돌로 쳐 죽여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지만 부드러운 음성으로 사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입장과 신념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분노와 증오를 표출하는 못된 존재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너무 잘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울은 무릎을 꿇고 회개했습니다. 사울은 나중에 사도가 되어 평생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는데 죽을 때까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라고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2-15).

한국교회의 최초의 일곱 목사님들이 된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도 믿기 전에는 모두 못된 존재들이었습니다. 길선주는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고 이기풍은 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그의 턱을 부셨던 깡패였으며 장대현 교회 건축 현장에 깡패들을 데리고 가서 모두 때려 부셨던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내려다보시면서 그들을 부드럽게 부르셨습니다. “길선주야! 길선주야!” “이기풍아! 이기풍아!” 결국 주님의 부드러운 긍휼과 사랑의 음성에 길선주 도사도 이기풍 깡패도 무릎을 꿇고 울면서 항복을 했습니다. 길선주 도사는 목사가 되었고 한국교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기풍 깡패도 목사가 되었고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평생 새벽마다 울면서 “나는 죄인중의 괴수외다!” 라고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긍휼과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악독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긍휼과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가 힘써서 할 일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과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바라보며 깊이 묵상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다른 모든 일보다 먼저 힘써서 할 일은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과 긍휼과 사랑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깊이 묵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과 몸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불평과 불만 그리고 분노와 저주의 독소들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불평과 불만이 감사와 고마움으로 바꿔질 것이고 분노와 저주가 긍휼과 사랑으로 바꿔질 것입니다. 그러면 원수 사랑의 모델인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될 것이고 본 받고 싶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들의 마음과 몸 속에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사랑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이라도 채워주시옵소서! 우리도 원수 갚으려는 대신 원수에 대한 긍휼과 사랑을 조금씩이라도 지니게 하시옵소서!”


원문보기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1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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